편집실 통신
흑역사로 남은 나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 구입기
by 참새🐦
‘지금은 장마철’이라고 일기예보에서 말하는데, 파주와 서울을 오가는 저는 그 말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장마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 비가 내리지는 않으니까요. 대신 회색 구름이 햇볕을 가려 준 덕에 날이 선선해서 제법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름 중에 이런 날들이 휴가처럼 가끔 찾아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도 듭니다. 비 많이 내리는 동네 분들 부디 무사하시기를!
긴장 속에 문을 연 서울국제도서전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도서전을 앞둔 몇 주 동안은 본업인 편집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안으로만 치닫고 있었습니다. 자신감도 뚝 떨어져 도서전을 잘 치르지 못할 것만 같았어요. 그렇지만 들풀과 비밀요원K라는 든든한 동료와 부스를 찾아와 주신 독자님들이 있었습니다. 동료와 짐을 나누어 지고, 독자님들과 마음을 나누다 보니 생각의 숨길을 막고 있던 내면의 벽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날이 갈수록 ‘즐겁게’ 도서전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서전 특별 뉴스레터이니 그에 걸맞게 이번 도서전을 보며 든 생각 두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첫째, 젊은 관람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몇 해 전부터 도서전을 찾는 2030 세대가 빠르게 늘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입장권을 사전 예매 방식으로만 판매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도서전 관람이 2030에게 일종의 ‘놀이’가 된 것이 핵심 요인 아닐까 하고 뒤늦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도서전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이 역시 몇 해 전부터 조금씩 감지된 변화이지만 올해 도서전은 축제라는 말에 좀 더 잘 어울리는 장이었습니다. 적잖은 출판사들도 축제에 맞게 준비했고, 관람객들 얼굴에서도 웃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희도 진즉에 이렇게 생각하고 도서전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내년에는 좀 더 잘 준비하겠습니다.
저는 도서전 기간 내내 부스를 지켰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아서 마침 편집 일로 바쁜 들풀 차장님에게 “주중에는 일 보시고 주말에만 나오셔도 돼요.” 하고 말씀드렸죠. 닷새 내내 부스에 서서 인사하고, 책 소개하고, 사탕과 그림카드 나눠 드리고, 결제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을 몇 가지 경험했습니다. 오랫동안 잊지 못할 사건 하나와 함께 말이지요.
도서전 첫째 날, 그러니까 6월 18일 오후 네 시쯤으로 기억합니다. 낯설지 않은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어요. 어디서 뵌 듯했지만 그런 분이 어디 한둘인가요. 그냥 저처럼 평범한 얼굴이겠거니 했습니다. 책을 찬찬히 살펴보다 몇 권 골라 결제를 부탁하신 손님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부스 앞을 지나간다는 소식에 저희 부스에 잠시 머물면서 그 광경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저희 부스에는 손님들이 지친 다리를 쉬게 할 의자가 있었으니까요.
자연스레 손님과 말을 트고 얘기를 주고받다가 글을 쓰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죠. “어느 분야 글을 쓰세요?” “소설이요.” “소설가셨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네, 김금희라고 해요.”
헉, 김금희 작가님이라니! 반가움, 기쁨, 고마움이 밀려드는 가운데 ‘작가님 책을 끝까지 읽은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저를 바짝 긴장시켰습니다. “몰라 봬서 죄송해요. 제가 문학 쪽을 워낙 몰라서… 죄송하게도 작가님 쪽글들만 몇 편 봤습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착한 글이라는 인상은 또렷하게 남았습니다…” 제 입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비밀요원K는 부지런히 작가님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부서질 지경이었습니다. 이미 실수를 저지른 것 같고, 계속 실수를 저지르고 있고, 앞으로도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저를 구해 준 은인은 마침 부스 앞을 지나간 문재인 전 대통령. 부스에 머물던 목적을 이룬 작가님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마 그러신 것 같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네요.
다음 날 아침, 김금희 작가님이 구입한 『나는 새들이 왜 노래하는 아네』 옆에 작가님 사진에 ‘김금희 작가님이 사 가신 책’이라는 문구를 더한 POP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오글거리는 문구를 쓴 건 편집자 생활 20여 년 만에 처음이라 부끄러워 바깥으로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부스 앞을 지나가는 관람객들이 POP를 보고 즐거워해 주신 덕분에 오후 들어서는 부끄러움이 거의 다 증발해 사라졌습니다. 여러 모로 고마운 독자님들. ^^
사건은 토요일 아침에 터졌습니다. 앞선 사흘을 무난하게(?) 넘긴 데다 들풀 차장님도 부스에 합류한 덕분에 여유라는 것을 조금 즐겨 볼까 하던 그때, 어느 관람객이 김금희 작가님 사진이 있는 POP를 보고 즐겁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 게 아니겠어요. 반가운 마음에 곁으로 다가가 “수요일에 작가님이 저희 부스를 방문해 주셨거든요.”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분은 계속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자리를 옮겼습니다. ‘내성적인 내가 부스 바깥에서 손님을 응대하다니!’ 뿌듯함을 느끼며 부스 안으로 들어서는 찰나, “방금 그분 김금희 작가님이세요.” 하고 부스 안에 있던 원더박스 서포터분이 말씀했습니다. “네?” 제 모든 것이 순간 작동을 멈춘 듯했습니다. 그럴 리 없다고, 바로 옆에서 못 알아봤을 리 없다고, 사흘 전에 만난 분을 어떻게 못 알아보겠느냐고, 그날도 실례를 했는데 오늘 또 했을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김금희 작가님이 맞다는 증언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습니다. 30초쯤 흘렀을까요? 저는 부스를 달려 나가 작가님을 찾아 전시홀을 돌아다녔습니다. 못 알아봐서 죄송하다 사과하고,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 안 된다는 마음 때문에 못 알아본 거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작가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부스로 돌아온 저는 머리를 부여잡고 “나 어떡해~” 하고 외쳤습니다. 도서전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다 이내 올해 안에 김금희 작가님 책을 두 권 읽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기도 하고, 작가가 가장 바라는 것도 독자일 테니까요. 그날이었나, 아니면 그다음 날이었나? 저는 창비 부스로 가서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들고 계산대에 섰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 책을 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