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지만, 그런 역사 연구를 통해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좀 더 의미심장하고 충격적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 문명은 평화로운 시절에는 항상 불평등을 증가시켜왔으며, 불평등의 유의미한 감소는 심각한 폭력 상황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즉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그리고 치명적인 대유행병”만이 불평등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 네 가지를 성경에 나오는 묵시록의 네 기사에 빗대, “평준화의 네 기사”라고 부르지요.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이 네 기사가(정확히는 이 네 기사만이) 역사에서 불평등을 감소시켰음을 보여줍니다. 이 책의 원제인 the Great Leveler(Leveler=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네 기사를 가리키지요.
이런 결론은 생각해볼수록 상당히 우울합니다. 평화시에는 불평등이 늘어나는 게 정상이고, 일반적인 정책 수단으로는 불평등을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니까요. ‘피비린내 나는 유혈 사태 없이는 불평등을 감소시킬 수 없다니,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거란 말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죠. 반론도 제시하고 싶어집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 등 각지에서 불평등이 감소한 ‘대압착’을 반례로 들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자는 단호합니다. 그 역시 전쟁과 그 후의 인플레이션으로 엘리트의 부가 파괴되고 대중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부자들이 양보한 결과라고 말이죠. 실제로 그 이후 대규모의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되고, 냉전의 위험도 사라지면서 불평등은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죠. 저자가 인용한 피케티의 다음과 같은 말도 전쟁이 평준화에 끼친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20세기에 불평등을 줄인 것은 단연코 바로 전쟁이라는 혼돈이었고, 그에 수반된 경제적․정치적 충격이었다. 더 큰 평등을 지향하는 점진적이면서도 합의에 기반을 둔 갈등 없는 발전이란 없었다. 20세기에 과거를 지우고 사회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끔 한 것은 바로 전쟁이지 조화로운 민주주의나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었다.”
사실 피케티 역시 그의 책에서 지난 300년간 자본수익률은 항상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빈부격차가 커졌다는 걸 보여 주었죠. 다른 분야의 연구지만, 같은 결론인 셈입니다.
전쟁만이 아니라 다른 세 기사들도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체제 자체를 파괴할 만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러시아나 중국, 캄보디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사회의 부를 폭력적으로 분산시키면서 불평등을 감소시켰지만, 거기엔 엄청난 폭력이 따랐죠. 국가 붕괴는 말 그대로 기존 체제가 무너지면서 불평등도 줄입니다. 중세의 흑사병은 인구를 4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 줄이면서 부자들의 수도 줄였고, 남은 인구들이 부를 나눠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한국의 사례도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등장합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해방 후 이루어진 토지 개혁은 전쟁의 위협과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 없이는 설명할 수 없지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한국의 토지 불균형은 심각했다. 농촌 가구의 3퍼센트 미만이 전체 토지의 3분의 2를 소유한 반면, 58퍼센트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토지 개혁을 밀어붙인 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의 지방 소작인을 동원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었다. (…) 재분배 효과는 지대했다. 지주는 소득의 80퍼센트를 잃은 반면, 농촌 가구의 하위 80퍼센트는 20~30퍼센트를 얻었다. (…) 1945년 0.72 또는 0.73으로 높았던 토지 소유 지니계수는 1960년대에 0.30대까지 하락했다. 토지 개혁의 평준화 효과는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증폭됐다. (…) 따라서 많은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가 완전히 소멸하고, 훗날 교육에 대한 폭넓은 접근 기회로 지속된 고도의 평등한 국가가 탄생했다.”
그 결과 한국은 식민지 출신 국가 중 드물게 평등한 상태에서(폐허의 상태이기도 했지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한국이 지금처럼 성장한 한 원인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죠. 그리고 저자의 주장처럼, 평화 시기인 지금은 불평등이 증가하기만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결론 다음입니다. 저자의 분석처럼 대규모의 폭력만이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면, 불평등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할까요? 비관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체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전쟁, 혁명, 국가 붕괴, 전염병이라는 네 가지 힘이 평준화를 이뤄냈다는 것은 역사의 결과이지, 평준화를 목적으로 이 네 가지 힘이 도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쟁이든 뭐든 일어나서 세상이 몽땅 망해버리면 다들 평등해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고 세상을 망하게 하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저는 이 책의 내용을 세상이 극심하게 불평등해지면 전쟁이나 혁명, 국가 붕괴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극심한 불평등->반란과 전쟁-새로운 국가 수립->토지 분배로 평등 추구->시간이 지나며 불평등 증가->반란과 전쟁의 사이클이 이어진 것이 낯설지가 않죠. 불평등이 지나치게 커지면 사회가 분열되고 국가의 존속이 위험해진다는 것도 역사의 철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는 그렇게 되기 전에 평등한 분배를 추구하도록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그 가능성을 찾고 시도하는 것이 앞으로의 역사에 주어진 과제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