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다음날입니다. 선거 결과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항상 ‘국민이 승리했다’거나 ‘민심이 무섭다’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물론 그건 절대적으로 사실이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나 쓸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당이 이기든 야당이 이기든, 모든 선거 결과는 국민의 선택이니까요. 누가 이기든 집합적인 국민은 항상 승리합니다. 동시에 ‘국민이 승리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국민은 이기고, 어떤 국민은 집니다. 그러나 어디에 투표를 한 국민이든 모두가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지닌 유권자입니다. 선거에서 패자, 정확히는 소수에 투표한 이들의 의사를 어떻게 포용하고 담아낼 것인가? 저는 이것이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아침에 떠오르는 책이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입니다. 이 책은 선거에서의 승패를 넘어서 정치 문화와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 기성 정당과 정치인들이 포퓰리스트와 손잡는다.
- 정치인들이 경쟁자에게 반국가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 음모론을 제기하며 결과에 불복한다.
-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해 행정명령을 남발한다.
- 의회가 예산권을 빌미로 행정부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탄핵을 추진한다.
- 정부가 명예훼손 소송 등으로 비판적인 언론의 입을 막는다.
이런 신호가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이 책을 읽은 건 2021년쯤이었는데요, 그때 우리나라 상황에 비추어봐도 상당히 들어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더 심해진 것 같아서 섬뜩하네요.
민주주의 연구자인 두 저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며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패턴을 보여줍니다. 저자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정당의 기능입니다. 정당들이 극단적인 인물이 정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문지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반민주적인 인물과 손을 잡고 후보로 내세운다면 선거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에는 재앙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바로 그런 경우였죠. 반면에 헨리 포드는 인기가 있었음에도, 나치즘에 호의적이었기에 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자들은 국민 참여 경선 방식에 비판적입니다. 당의 지지자들이 후보를 결정하는 데 깊이 관여하게 되면, 극단적인 인물이 후보로 선출되는 걸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죠. 미국의 정당들도 대선 후보 선출에서 꾸준히 일반 당원의 영향력을 키워왔는데, 그 결과 트럼프도 후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죠. ‘밀실 정치’는 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득하지만, 저자들은 대중의 영향력을 정치에 그대로 반영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후보의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밀실’은 필요하다는 것이죠. 지지자와 정치인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강성 지지자의 목소리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갈수록 정치권에서 대화와 타협이 힘들어지고, 정치인들이 과격한 언행을 보이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이 책에서 가장 귀담아들을 부분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정치 참여자들이 암묵적으로 지키는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꼽습니다.
먼저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개념”입니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죠. 상대 정당도, 그들의 지지자도 동등한 존재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찍’이나 ‘2찍’ 같은 명칭으로 상대를 비하하고 악마화하는 건 상호 관용의 정신에서 벗어난 일이겠죠.
제도적 자제는 좀 더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쉽게 말하면 주어진 법적 권리를 사용하는 데 아주 신중해야 한다는 규범입니다. 단적으로 탄핵을 예로 들어보죠. 헌법상 국회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3분의 2의 찬성이 있으면 대통령 탄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중대한 헌법 위반 사유 없이 탄핵을 시도하는 건 정치를 전쟁으로 만들 겁니다. 대통령이 의회가 제출한 법률안을 거부하는 것도 대통령의 권리이지만, 자제 없이 남발한다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요. 상대에 대한 공격에도 매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야구에서 점수차가 많이 나는 경기에서 도루를 하지 않는 것이나, 축구에서 상대팀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쓰러졌을 때 공을 밖으로 보내는 것이 제도적 자제의 한 모습일 겁니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상호 관용이 없어지면 제도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 상대를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상호 관용도 없어지겠지요. 신사협정을 맺듯이 정치 플레이어들이 서로 어느 정도의 선은 지켜야만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다고 저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최근의 정치에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보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추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죠. 새 국회에서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